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기시 노부스케 (문단 편집) === 전후 전범기소에서 총리 취임까지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EWd9HmUEAA_sLS.jpg|width=100%]]}}}|| || [[1946년]] [[3월 26일]], 스가모 형무소에서 촬영된 머그샷 || 전쟁이 끝난후 고향 [[야마구치현]]에 은둔해 있다가 전쟁범죄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러나 도조가 목이 달아난 것과는 달리 경제통이었던 기시나 [[코다마 요시오]]는 써먹을 궁리가 있다고 봤는지 [[GHQ]]는 도조가 처형된 다음날에 이들을 불기소 처분하고 공직추방조치만을 취하게 된다. 물론 이것도 공짜는 아니었다. 기시와 코다마는 일본이 점령지에서 약탈한 보물들과 자신들만이 알고 있던 국가기밀정보를 넘기는 조건으로 사법거래를 해 풀려난 것이다. 이후 한동안 동양 펄프라는 회사에서 회장으로 재임하다가, 1952년 공직추방조치가 풀리면서 정계로 복귀해 [[보수방류|자주헌법 제정, 자주군비 확립, 자주외교 전개]]를 슬로건으로 일본재건연합을 결성하고 1953년 중의원 선거에 임했지만, 일본재건연합이 선거에서 대패하자 '''[[일본사회당(1945년)|일본사회당]]에 입당'''하려는[* 우익이자 전범 용의자인 기시가 사회주의 정당인 사회당에 입당하려 했던게 이상하게 보일 수 있는데, 이를 이해하려면 전쟁 이전 사회당의 전신인 [[사회대중당(일본)|사회대중당]]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당시 전쟁 이전 사회대중당은 크게 세개로 나뉘었는데, 그 중 당내 좌파는 일본제국 체제 붕괴와 인민전선 결성을 통한 사회주의적 개조(다만 반공주의로써 공산주의엔 반대함)를 목표로 투쟁하다가 당국의 탄압을 이기지 못하고 관짝에 못이 박히고 말았다. 남은 두 파벌인 중간파와 우파는 일본제국 채제 유지와 체제 유지 내에서의 개혁이라는 큰 틀에는 동의했으나 우파가 의회민주주의 수호를 외친반면 중간파는 일본의 의회주의에는 미래가 없다면서 당시 새롭게 떠오르던 [[통제파]]와 [[혁신관료]] 세력에 집중해 이들을 끌어들이고자 했다. 중간파와 우파의 투쟁 결과 중간파가 승리해 헤게모니를 잡았고, 1940년을 기해 [[고노에 후미마로]]의 총리 복귀가 가시화되고 일국일당원칙을 내세우며 신체제운동을 발족하자 이에 열렬히 찬성하며 고노에가 만든 대정익찬회에 가입, 간부의 한 축을 맡아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 등의 일본의 전쟁수행 및 확장행보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전후 중간파는 전범으로 관짝에 못이 박혀 우파와 좌파가 부활한 사회당을 주도했으나 이후 정계 복귀 이후에 좌파와 갈등을 빛고 우파와 동맹을 맺어 좌파로부터 다시 주도권을 가져왔던 상황이었다. 기시가 사회당에 입당하려 했던 건 이런 이유에서였다. ]제스처도 취한다. 허나 사회당에서 거부하자 자유당에 입당해 자유당 후보로 중의원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1954년 [[요시다 시게루]] 총리가 기시의 의사에 반하는 경무장+대미협조 정책으로 나가자 이에 반발하다 자유당에서 출당되었다. 이후 11월에 [[하토야마 이치로]]([[하토야마 유키오]] 전 총리의 조부)와 함께 일본 민주당을 조직했다가 좌우분열이 극심했던 일본사회당이 재통합하자, 이에 위기의식을 느끼고 보수대연합을 주창, 자유당과 합당하여 [[자유민주당(일본)|자유민주당]]을 창당하기에 이른다. 창당 직후 자민당의 초대 간사장을 맡았다. 이후 1956년에 열린 자민당 총재선거에 입후보 하여 1차 투표에서 1위를 차지하였으나 2차 투표에서 2위 [[이시바시 단잔]], 3위 [[이케다 하야토]] 연합에게 7표차로 패하였다. 순식간에 비주류 파로 밀려난 기시파 내부에선 단 한명도 각료를 보내지 말자는 강경론과 최대한 많은 각료자리를 얻어내자는 타협론이 엇갈린 가운데 기시는 외상으로 입각하였다. 기시의 입각은 다행이라 할 수 있었다. 2개월 후 이시바시가 뇌연화증으로 쓰러져 총리직 수행이 불가능해지자 기시는 노력하지 않고 뜻밖에 이시바시의 후계자로 지명되어 총리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이다. 전범 용의자 출신의 기시가 총리의 자리에 오를수 있었던건 무엇보다 풍부한 자금력 덕분이었다. 기시가 이시바시로부터 후계자로 지명될 당시에 이시바시 내각의 간사장이었던 [[미키 다케오]]가 기시와의 정치적 스탠스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찬성한 것도 기시의 풍부한 자금력과 인맥을 인정하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기시의 금맥(金脈)은 크게 네 가지로 분류되었다. 첫째, 철강업계였다. 기시는 알다시피 상공관료의 거두였고 나가노 시게오, 후지이 헤이고 등 철강업계의 실력자들과는 태평양 전쟁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다. 둘째, [[일본경제단체연합회|경단련]], 일본상공회의소를 비롯한 경제단체이다. 일본 경제계의 집행부와도 같았던 이들 단체에도 기시의 인맥이 적잖이 포진해 있었는데 우에무라 고고로, 후지야마 아이이치로 같은 인물들이 대표적이었다. 경단련 부회장, 회장을 오랫동안 역임하며 재계의 정치자금조성을 주도한 우에무라는 기시와는 농상무성시절부터 함께 일했던 사이였고 기시의 [[문경지교|문경지우]]라고 까지 일컬어졌던 후지야마 아이이치로는 일본 최대의 설탕재벌인 동시에 일상 회장을 역임하며 '친구' 기시를 전폭적으로 지원하였다. 셋째는 [[닛산]]의 아이카와 요시스케, 구하라 광업의 구하라 후사노스케 등 기시와 동향인 야마구치현 출신 재벌들이었다. 아이카와와 구하라를 필두로 한 이른바 [[조슈|조슈(長州)]] 재계인들은 [[이토 히로부미]] 이래 6번째의 조슈 출신 [[재상]]을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마지막으로 넷째는 스미토모 그룹이었다. 스미토모 화학 회장이면서 사장회인 백수회(白水会)의 좌장이었던 도이 마사하루는 기시와 동경대학 법학부 시절부터 수석경쟁을 하며 교우를 가졌던 사이였다. 여기에 더하여 기시는 해외 유전 개발을 비롯하여 각종 이권사업에 개입한건 물론이고 코다마 요시오, 사사카와 료이치 등을 통하여 우익세력에도 영향력이 있었다. 그리고 후일 드러난 사실이지만 심지어 [[미국 중앙정보국|CIA]]로부터도 자금을 지원받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